【기고】이기지않고 다스리는 ‘옛 선조들의 여름나기’

칼럼 > 2023-08-03 14:16:00

 


▲ 대전대 바이오헬스혁신융합대학사업단 교수 박승규 


사계절이 순환하는 우리나라에서 피서는 삶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피서는 오늘날의 전유물일까? ‘쇠나 돌이 녹아 흐른다’는 삼복더위에 예나 지금이나 힘들긴 마찬가지일 터. 선조들이 터득한 최고의 피서법은 ‘피서’라는 말 자체에 담겨 있다. 삼복 무더위는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미 ‘세 번 항복’했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듯, 멀찍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삼복’은 한여름인 7~8월 중에 있는 세 절기를 이르는 말이다. 초복, 중복, 말복은 역 열흘 간격으로 더위가 절정을 향해 가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되는 때다. 이 삼복(三伏)에서 복(伏)은 엎드릴 복으로 사람 인(人)과 개견(犬)이 합쳐진 모양을 띠고 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사람이 개처럼 엎드려 지낸다는 의미이다.

 

‘더위를 피한다’는 뜻의 피서(避暑)는 자연의 변화와 힘에 맞서지 않고 순응하며,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유두절에 머리 감기, 탁족, 부채나 죽부인 등을 이용하는 풍습이 그렇다.

 

# 왕도 경연을 중지했던 삼복

 

신라인에게 인기 있던 피서지는 태화강 상류인 울주군 두동면 일대였다. 525년 음력 6월 18일, 법흥왕의 아우이자 진흥왕의 아버지인 갈문왕을 비롯해, 김유신 가문 사람들도 태화강 수계를 자주 찾았다. 경주 남쪽 비교적 가까운 곳이면서,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여름철 피서지로 안성맞춤이었다. 700여 년간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는 궁남지가 있다. 우리나라 정원문화의 시원이다. 서동요 속 백제 무왕이 된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이 전해 온다. 바다같이 큰 연못을 왕궁 근처에 만든 것은 백제가 처음이었다. 무왕부터 마지막 의자왕까지 군신들은 배를 띄우고 연회를 즐겼다. 신라는 문무왕 대에 인공 호수 안압지를 만들고, 임해전을 세웠다. 백제 궁남지와 같은 개념이었다. 울산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태화루는 신라 때 최초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997년 고려 성종이 들렀을 정도로, 풍광이 뛰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충렬왕은 여러 차례 개경을 떠나 비교적 선선한 서경(평양)에서 정무를 봤다. 사실상 여름철 행궁인 셈이다. 고려 시대부터 삼복 때면 관리들에게 여름휴가를 줬다. 삼복 때는 왕도 공식적으로 경연과 정무를 중지했다. 조선 정조 연간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의 주 무대는 중국 북경 동북쪽 230km 떨어진 ‘피서산장’이다. 역대 청나라 황제 대부분이 북경의 더위를 피해 매년 4월에서 9월까지 6개월 동안 그곳에서 지냈다. 조선은 청나라처럼 화려한 여름 별장을 따로 짓지는 못했지만, 궐 안에 휴식과 피서를 겸할 수 있는 별도 공간을 마련했다.

박은주 기자 / silver51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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