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시리즈(6)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호랑이..

칼럼 > 2022-05-22 20:16:01

버나드 쇼는 “인간이 호랑이를 죽이면 우리는 그것을 스포츠라 부른다. 호랑이가 인간을 죽이면 우리는 그것을 잔인한 공격이라 부른다”고 했다.  


“호랑이가 경복궁 근정전 뜰에 들어왔다.”<1405(태종5) 7월 25일>

“창덕궁 후원에 호랑이가 들어왔다.”<1465년(세조11) 9월 14일>

“창덕궁 소나무 숲속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물었다.”<1603년(선조36) 2월 13일> 

“인왕산에서 호랑이가 나무꾼을 잡아먹고, 인경궁 후원으로 들어왔다.”<1626년(인조4) 12월 17일>

“호랑이가 경복궁 후원에 들어왔다.”<1752(영조28) 1월2일>


위 기록은 일부에 불과하다. 조선 시대 가장 큰 민폐 덩어리는 호랑이였다. 한양도성에 수시로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로 조선은 호랑이가 많은 나라였다. 요즘 무시로 도심까지 내려오는 멧돼지나 몇해전 대전 오월드 동물원에서 탈출한 퓨마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조선 500년을 통틀어 궁궐이나 민가 주변에 호랑이나 표범이 나타난 게 이루 셀 수가 없을 정도. 인왕산 서쪽 자락의 무악재는 호랑이 출몰 단골 장소였다. 행인들은 여럿이 모여 꽹과리를 치며 군사들의 호위 아래 겨우 고개를 넘었다. 서울에서 호랑이가 출몰한 곳은 인왕산 골짜기만은 아니었다. 멀게는 수락산, 가깝게는 4대문 안에서도 어슬렁거렸다. 


동서고금 역사의 결정적 장면에 등장하는 동물은 여럿이다. 그중 호랑이는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호랑이 사냥’이 큰 역할을 했다. 


쿠데타 중심인물 이귀는 1622년 가을, 마침 군사력을 보유한 황해도 평산 부사로 임명됐다. 그 후 평산에서 개성에 이르는 길목의 호랑이 퇴치를 위한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귀와 호랑이 잡는 전문 부대 착호군은 광해군을 몰아내는데 선두에 나섰다. 착호갑사들은 호랑이 사냥 대신 광해군을 잡았다. 인조반정의 숨은 일등 공신은 호랑이다.


 

조선에서 처음 호랑이 출몰 기록은 태조 1년부터 나온다. 개경 도성 북쪽에 들어온 호랑이를 흥국리 사람이 활로 쏘아 죽였다는 내용. 조선 시대 호랑이 피해는 요즘 교통사고 발생률보다 높았다. 1571년(선조4) 10월, 눈썹과 이마가 흰 백호가 현 고양시에 출몰했다. 무려 사람과 가축 400여 마리를 물어 죽였다. 지금 들어도 충격적인 사건이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자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는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 심지어 1607년(선조40) 7월 18일, 청덕궁 안에서 호랑이가 새끼까지 낳았다. 선조는 궁에 출몰한 호랑이를 꼭 잡도록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 호랑이와 새끼를 잡았다는 기록은 없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에 걸쳤던 현종과 숙종, 영조 시대에는 호랑이 피해가 극심했다. 1701년(숙종27) 강원도에서만 화천 지방을 중심으로 6~7년 동안 300여 명이 죽었다. 1734년(영조10)에는 줄곧 호랑이가 횡행했다. 사람과 가축을 해쳐 8도에서 보고가 끊이지 않았다. 이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죽은 자가 140명이었다. 


이듬해에는 강원도에서는 40여 명이 죽었다. 1754년(영조30)에는 경기 지방에 호환이 심했나 보다. 4월 한 달 동안 무려 120명이 호랑이에게 먹혀 죽었다. 영조 때는 궁궐에 호랑이가 출몰한 횟수도 3번이나 됐다. 경복궁에 2번이나 들어왔고, 영조가 주로 거처했던 경덕궁(경희궁)에도 호랑이가 들어올 지경이었다. 심지어 호랑이가 나라의 제사에 쓸 소나 돼지 등 제물을 보관하는 ‘전생서’에 들어가 돼지를 물고 가는 ‘웃픈’ 일도 벌어졌다.


1777년(정조1) 9월 19일에는 호랑이가 궁궐 수비대 병졸을 물어간 초유의 사건까지 발생했다. 정조는 도성 주변에서 호랑이나 표범이 은신할만한 숲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일부 신하들이 왕릉 주변의 나무는 베지 말라고 말렸지만, 정조는 ‘백성들의 안전’을 내세워 벌목을 강행했다. 


1796년(정조20) 11월, 성균관 뒷산에서 호환이 발생했다. 군영에서는 호랑이 사냥에 나서려 했으나, 정조는 이를 불허했다. ‘엄동설한의 사냥은 그 폐단이 맹수보다 심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한양 도성 내 호랑이나 표범 출몰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고종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1868년(고종5) 9월에는 북악산 등에서 호랑이 3마리, 홍은동 포방터 부근에서 2마리를 잡았다. 1883년(고종20) 1월 2일 고종은 인왕산 밑에서 표범을 잡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을 주었다. 이후 궁궐에 호랑이가 들어온 것은 순종 때 창경원(창경궁)이 동물원이 되고 나서다.



글 박승규 논설위원  

박은주 기자 / silver51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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